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보신 전쟁 (문단 편집) === 우에노 전쟁 ===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280px-UenoSenso.jpg|width=100%]] || || '''관영사 앞에서 혈전을 벌이는 쇼기타이들과 토사번의 적웅대 무사들''' || 막부는 항복했지만 휘하 병력들이 막부의 명령에 순순히 따른 것은 아니었다. 그중에는 [[우에노]] [[http://www.kaneiji.jp/|관영사]](上野 寛永寺)에 칩거하고 신정부에 대한 반항적 태도를 공공연히 내세우는 무장집단, 창의대(쇼기타이)가 있었다. 창의대는 무혈개성에 반대하는 구 막신들과 히토쓰바시 가문의 가신인 시부사와 세이이치로(渋沢 成一郎, 1838 ~ 1912)[* [[시부사와 에이이치]]와는 사촌지간이며 메이지 유신 이후 기업인으로서 정치인으로서 이름을 남기게 된다.]가 결성한 단체로서 혼다 도시사부로(本多 敏三郎)가 발표한 격문에 의거해 모인 사람들 중에서 시부사와 세이이치로가 두령으로 선출되는 방식을 취했다. 원래는 [[슨푸]]로 내려가 칩거하기 전에 우에노 관영사에 머무르던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호위하고 다시 복권시키고자 하는 목적으로 모여들었던 단체로써 본디 치안의 유지와 장군의 경호를 명분으로 하고 있었으며, 신선조 잔당들도 포함한 대규모 불만세력이었다. 이들이 에도 시내에서 신정부군을 습격하여 구타하고 죽이는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사쓰마군 사령관인 [[사이고 다카모리]]는 [[카츠 카이슈]]를 만나 이 문제에 대한 조치를 요구했지만 배신자 취급받는 카츠의 말이 통할 리가 없었다.[* 카츠 카이슈는 창의대 지휘역이었던 야마오카 텟슈를 파견했지만 배신자라는 고성만 듣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거기에 관군과 항전하려는 각지의 패잔병이 합류하여 총병력 3,000~4,000명에 이르는 대규모 세력이 되어있었다. 게다가 황족인 린노지노미야 쿠겐호신노(輪王寺宮公現法親王, 1847 ~ 1895)가 관영사로 들어가 창의대의 추대를 받아 대의명분을 얻는 도구가 되기까지 하자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는 지경이 되었다. 결국 신정부는 이들 창의대를 진압하기로 결정한다. 진압작전의 지휘는 당시 전술의 천재라 불리고 추후 병부대보로서 병권에 실권을 통해 일본군을 기획, 기틀을 마련하는 조슈 번의 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次郎, 1825 ~ 1869)가 맡았다. 공격 예고일을 알리는 표찰을 세워 적의 탈주를 유도하고, 북쪽을 제외한 세 방향에서 포위해서 쳐들어가는 돌격전과 포격지원이었다. 작전회의에서 사츠마 번군의 배치를 본 사이고 타카모리는 "(우리 사츠마군을)[[미나고로시|모두 다 죽일]] 작정이요?"라고 물었고, 마스지로는 퉁명스럽게 "그렇소."라고 대답했다. 우에노 전쟁은 특히 정치적인 목적이 강한 전쟁이었는데 신정부는 이 우에노 전쟁을 신정부의 힘을 만방에 공표하는 이벤트로 삼을 목적이었고 즉시 에도 곳곳에 표찰을 세워 공격이 5월 15일 시작됨을 공표했다. 표찰을 세운 효과가 있어 공격 일자가 임박할수록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창의대 대원들은 점점 몰래 탈주를 개시했고 내부에서 항전파와 탈출파의 대립이 발생했고[* 시부사와 세이이치로는 요시노부가 에도를 떠난 만큼 그 호위를 명분으로 하는 창의대도 에도를 떠나 [[닛코 동조궁]] 방면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부장인 아마노 하치로는 철저항전을 주장하면서 분열이 발생했다.], 탈출파의 필두인 시부사와 세이이치로가 지지자를 이끌고 도주[* 이 사람은 나중에 진무대(振武隊)를 결성하여 신정부군과 재차 대립하지만 패하고 결국 에노모토 함대에 합류하여 [[에조 공화국]]으로 떠난다. 그곳에서 소창의대를 만들어 두령에 취임했지만 하코다테 전쟁에 패하면서 항복한다.]하면서 부장이었던 아마노 하치로(天野 八郎)가 이끄는 병력만이 남아 공격 당일에는 절반 이하로 줄어있었다. 이에 대항한 신정부군은 [[사가현|사가 번]]의 신무기 [[암스트롱포]]와 4근[[산포]]의 포병화력을 이용하여 측면지원을 개시하고, 사이고 타카모리가 이끄는 사쓰마군은 쿠로몬구치(黑文口)를 통해 관영사로 진입을 개시했다. 큰 비가 내리는 가운데 쿠로몬구치에서는 무진전쟁 중에서도 손에 꼽을 대규모 [[시현류|칼싸움]]이 벌어졌으나 포병지원에서 밀린 창의대는 결국 관영사 건물이 전소하면서 와해되었고, 신정부군이 미리 열어놓은 포위망을 통해 뿔뿔히 흩어져 탈출한다. 신정부군 사상자 100명, 구막부군 전사자 260명. 창의대 일부는 북방으로 탈주하여 동북전쟁에서 저항하고, [[에노모토 다케아키]]를 따라 하코다테 전쟁에도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에노 전쟁의 결과 신정부군은 에도 서부를 장악하고, 대내외적으로 막부 잔당도 신정부군 앞에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것을 각인시킴으로써 당초 예정했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